문묘는 군주제 시대에 재능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가장 큰 학교였기 때문에, 조정은 국자감에서
학생을 양성하는 데 주력했으며,
홍덕 왕조 시대에는 법률에도 규정되었습니다.
홍덕티엔친투의 책에 따르면, 제9조에
"학생들은 제국 시험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교 학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인애로 대하고, 의로움으로
자신을 훈련하고, 예의로 친구를 존중하고,
도덕으로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여 모든 사람이
좋은 관습과 전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방탕에 빠지거나,
도박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규정은 그들이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엄격한 금기 사항을 명시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문묘 국자감의 이런 규칙은
지금도 꿋꿋하게 이어나가야 할 덕목이며
진정한 보수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문묘 4번째 이야기 출발합니다.
문학사원의 학생들은 지암 신이라고 불리는데
처음에는 공무원, 왕족의 자녀, 관리들을 포함하여
학교 학생 대부분이 왕의 승인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레 왕조 시대에는 지암 학교가 확장되어
평민의 재능 있고 덕이 높은 자녀가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흐엉 시험과 예부 시험에 합격한 학생들은
황실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도 중국의 강한 영향을 받아
삘간색을 엄청 좋아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게 단두대인 줄 알았습니다.
너무나 의아했는데 자세히 보니 청동과 석조를 이용한
종이었습니다.
청동 종과 석조 징의 조합은 지성과
인간의 미덕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Văn Miếu – Quốc Tử Giám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귀중한 유물을 감상하고 일 년 내내 열리는
특별한 의식에서 독특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징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징은 물질적이고 단단하지만 소리는 맑고,
음악의 대가이며, 도(道)의 표현이며, 바퀸 선생의
소리만 드러날 수 있고, 공자의 뜻을 들을 수 있으며,
수천 년을 이어오고, 두 강의 소리, 음악에 대한 사랑,
신들이 듣고, 마침내 평화로 조화를 이룹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학교에 재학하는 학생 수는 약 300명이고,
학습 기간은 3년에서 7년까지입니다.
매 달과 연말에 정기 시험이 있습니다.
예부에서 실시하는 시험과 고시에 합격한 사람만이
국가고시와 왕립고시를 치러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재학 중에 예부에서 특별히 임명하여 관직에 오른
재능 있고 덕망 있는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학교는 규칙을 정해 학생들에게 먼저 미덕을 가르치고,
그다음에 문학을 가르쳤습니다.
학습 기간 동안 행운을 좇거나, 길거리에서 놀거나,
공부를 소홀히 하거나, 한 번이라도 성적을 놓치면
140장의 종이로 반성문을 적고, 두 번 놓치면 200장의
반성문 처벌을 받고, 세 번 놓치면 40대의 채찍질을 당하고,
네 번 놓치면 법무부에 신고되어 심문을 받고,
다섯 번 놓치면 군대에 입대를 해야 합니다.
1888년에 만들어진 Vạn thế sư biểu(영원한 모범적인 교육자)라는
4개의 한자가 대문자로 쓰인 현판이 있습니다.
이 글자는 공자를 기리는 중국의 강자(1662-1722)의 친필 사본입니다.
리(Ly)와 쩐(Tran) 왕조 시대에는 역사서에 황실 아카데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서 이 기간 동안
황실 아카데미의 교육과 학습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데
민란과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침략자에 의해 파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왕위를 찬탈하는 민란의 경우 주민들이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약탈을 해서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약탈이 이루어집니다.
차라리 다른 나라의 침략이면 그들은 그걸 오히려 보존하지만
민란의 경우 "돈 될만한 것들"은 모두 침탈합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오직 기둥과 지붕만 존재했던
역사의 건축물입니다.
두 마리의 용과 학이 주조된 향로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향로인지라 역사적인 유물은 아닙니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년)는 자디(治地)라고도 불리며,
노(魯) 나라 조이(曹夷) 출신으로 자사의 제자였으며
Kungkap(리빌)(기원전 483-401년)은 자 씨(Zisi)라고도 하며,
공자의 손자이자 단산의 제자입니다.
이 두 사람의 동상인데 중국의 영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증거입니다.
공자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 1729년 제작된
다이탄사(Dai Thanh)의 동상입니다.
탄산(기원전 505-436년)과 얀 후에(기원전 513-482년)
동상입니다.
왕의 의자였는데 역시, 추후 제작하였습니다.
남아 있을 리가 없지요.
뜬금없이 웬 금거북이?
하시는데,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에 가시면
거북이 두 마리가 박제가 되어있는데
나라가 전란에 쌓이자 호수에서 나와서 나라를
구했다는 전설의 그 거북이를 본떠 만든 게
아닌가 합니다.
역시 나중에 고증을 거쳐 제작한 거북이입니다.
이처럼 위패만 있는 제단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당시 건축양식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는데
어느 나라나 그 맥을 잇는 고유의 전승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탕롱 제국학원은 1076년부터 설립 및 운영되었지만,
규모와 조직 구조 면에서의 발전으로 국가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쩐 왕조(1225~1400) 시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황실 아카데미에서의 교육과 학습을 보다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티엔응친빈 5년(1236)에 쩐타이통 왕은
드 디외라는 직위에 황실 아카데미를 관리할 사람을 임명했습니다.
외국인들도 호기심에 놀이문화 체험을 하네요.
칸훙 시대에 조정은 도덕 기준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감독자와 유교 학자들의 역할을 계속 강조하며,
덕을 첫째로 두었습니다.
"국립대학과 각 지역의 유교학원에서 가르칠 때는
무엇보다도 덕을 먼저, 그다음에 문학을 가르쳐야 한다."
라고 했다고 하네요.
황실 아카데미는 베트남 군주제를 위해 재능 있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각 왕조는 덕망이 높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황실 아카데미의 학자로 선발했습니다.
제국 아카데미의 수장에는 총장과 부총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존경받는 교사일 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교육 행정가이자
위대한 미덕과 위신을 지닌 위대한 관료이기도 했습니다.
좋은 말로 도배를 했네요..ㅎㅎㅎ
###########################################
장장 한 시간을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빙하를 만나
드론으로 촬영했습니다.
영하 20도가 넘는 날씨에 한 시간을 걸어 만난 빙하
오고 가며 두 시간, 촬영 두 시간, 꼬박 네 시간을
추위에 떨며 만든 작품입니다.
완전 기진맥진 했습니다.
제발 그 고생을 기특하게 생각해서
구독과 좋아요 부탁합니다..ㅎㅎ
https://www.youtube.com/watch?v=ruDYW_9Ns5E
'베트남 하노이와 사파,닌빈,짱안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트남 하노이 문묘의 최초 대학교를 가다 5부 (0) | 2025.02.21 |
---|---|
베트남 하노이의 국자감이 있는 문묘 3부 (1) | 2025.02.19 |
베트남 하노이 최초의 아카데미 문묘를 가다 2부 (2) | 2025.02.18 |
베트남 하노이의 공자를 기리는 문묘와 국자감 1부 (0) | 2025.02.17 |
베트남 한 주간의 뉴스를 알려드립니다 (1) | 2025.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