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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VY IN ALASKA STORY
  • 알래스카의 낭만

프랑스17

베트남 SAPA의 원주민 " H'Mong족 "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프랑스어에서는 이 지역 이름을 " Chapa "로 발음을 하는데원래 사파의 어원은 중국어 중국어: Sa Ba, 沙壩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모래해변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사파에서 약, 52%를 차지하고 있는 원주민중흐몽(H'Mong)족 이야기를 들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흐몽(H'Mong)과 레드 다오(Red Dao) 민족이 다수를차지하고 있어 이들만의 독특한 생활상과 문화를알아가는 것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가 아닐까생각합니다. 그럼, 상쾌한 월요일 아침 출발합니다. 호몽족이라고도 하지만 민족명을 몽족으로불리는데, 몽족은 국경지대를 따라 베트남, 중국,라오스, 미얀마, 태국등에서 주거하는 소수 원주민 민족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 몽족은 54개 소수민족 중 가장 많은 인구를자랑하는데, 태국과 라.. 2024. 10. 28.
베트남 SAPA의 호수와 사파의 역사 해발 1,500m에 위치한 사파(Sa Pa)는 1901년부터 알려졌습니다. 1903년 프랑스인들은 군사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신선하고 시원한 기후 덕분에 프랑스인들은 곧 열대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는 유럽인들을 위한 리조트로 사파(Sa Pa)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13년에 군 요양원이 지어졌으며 현재는 마을의 상수도 지역이 되었습니다.  사파 인구는 약, 9만여 명에 이르는데 그중 절반이사파 중심지에서 살고 있으며 절반은 외곽지역에분포되어 생활하고 있는데 원주민은  흐몽족을위시해 7개의 원주민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니그들끼리 말이 통한 다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아름다운 호수와 주변 풍광을 소개하도록하겠습니다.그럼, 힘차게 월요일 아침 출발합니다. 정말 한폭의 그림 같지 않나요?차량이나 오토바이들.. 2024. 10. 14.
베트남 SAPA의 아침과 야경의 다른 모습들 1905년 프랑스인들이 지배를 할 당시이 지역 사파를 발견하고 휴양지로 개발을하게 되어 지금도 프랑스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역이름 SAPA는 중국어 이름에서 유래가되었는데 그 뜻은 " 모래 해변"이라는 뜻입니다.프랑스어로는 SAPA를 "CHAPA"로 쓴답니다. 베트남에서 눈이 오는 지역중 한 곳입니다.사계절이 뚜렷해서 비가 자주 내리는 요즘밤에는 제법 쌀쌀합니다.그러니, 판시판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은바람막이 점퍼나 따듯한 점퍼를 준비해 오시는 걸추천합니다. 그럼, 오늘도 변함없이 출발합니다.  호텔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니,아침 안개가 자욱해서 마음이 차분하게가라앉는 것 같아 더 잘 까?..하는 유혹이안개와 더불어 밀려오네요. 거의 시내 건물들이 호텔들이라고 봐도과언이 아닙니다. 발코니로 나와.. 2024. 9. 30.
베트남 SAPA를 왜 동양의 스위스로 불리우나 베트남 고지대이면서 아주 작지만 아름다웠던 마을이 주목을 받으면서 상업화의 물결로 원주민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 드는 것 같습니다.  사파는 베트남 북서부의 황리엔 손산맥에 있는 마을입니다. 1922년 프랑스에 의해 언덕 마을로 건설된 이 번화한 고산 마을은 현재 트레킹 명소와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판시판 산으로 유명합니다.  베트남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오토바이 보다는 차량이 많은 편이라 공기가 비교적 맑은 편입니다.밤만 되면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의마음을 들뜨게 하고 설레게 합니다. 사파는 움직이면 바로, 모든 게 돈으로 직결이 됩니다.등산을 해도 가는 곳마다 입장료를 받고 하다못해동네를 들어가도 입장료를 받는 그리고, 폭포마다입장료를 받는 그야말로 날개 안 달린 강도라 할 수있습니.. 2024. 9. 11.
베트남이 여행과 살기 좋은 이유는? 동남아 국가중 한국인을 가장 정겹게 생각하는 나라가바로 베트남입니다.박항서 감독이나 한류로 인한 영향도 크지만 베트남 민족 자체가 아직은 우리나라 70년대 시골 인심과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가 무엇을 물어봐도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고친구들끼리 술을 마시다가도 인사를 건네면흔쾌히 술을 건네기도 합니다. 물가 자체도 태국이나 필리핀보다 훨씬 더 저렴하게생각이 드는데 베트남에서 산다고 가정을 하면 특별하게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집을 산다고무리를 할 필요는 거의 없더군요.사회주의 국가라 땅은 정부 소유이기에 렌트개념입니다. 우리가 흔히 월남전이라고 이름을 붙여 호칭을 하지만 이들은 " 항미전쟁"이라고 합니다. 서방국가와 싸워 이긴 나라는 오직, 유일하게 베트남인데 프랑스와의 전쟁이나 미국과의 전쟁그리고, .. 2024. 8. 7.
베트남 다낭의 단골 반미 카페를 가다 베트남 여행을 하면서 카페나 식당을 단골로삼으면 아주 편리합니다.주인장과 간단하게 대화도 나누고 내 입 맛에맞는 음식을 미리 선정을 하고 주문을 하면다음 날 가면 자동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으로 고무나무 대신커피나무를 심게 하고 빵을 만들어 식문화를발전시키고 건축 양식도 프랑스 풍의건물들이 많습니다. 물론,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그만큼 베트남 국민의 고혈을 빨아 엄청난 이익을갈취했으니까요.제일 아쉬운 점은 도자기로 유명한 베트남을 프랑스가공장화로 확대하면서 전통 기법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바게트 빵에 여러 다양한 토핑을 하여 만드는 반미는한 끼 식사로 너무 안성맞춤입니다.제가 자주 가는 단골 카페를 소개합니다. 반미의 뜻은 "반"은 과자나 빵을 뜻하고 "미"는 밀을말합니다. .. 2024. 8. 5.
베트남 다낭의 도심지 사찰을 찾아서 베트남의 불교는 다른 나라의 불교와 궤를달리하고 있는데 베트남인들이 탄압을 받듯이불교인들의 탄압이 아주 오래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탄압을 받았습니다. 중국으로부터 그리고, 주변국들로부터 대승불교가전해져 자리를 잡았지만 , 프랑스의 식민지 때부터는본격적인 불교 탄압이 강했습니다. 프랑스의 가톨릭이 자리를 잡기 전에는 베트남은프랑스로 유학파들이 생겨나고 대통령은 불교를본격적으로 탄압을 하자, 불교계의  종장(宗長) 틱꽝득은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 비폭력항쟁에 참여하였고, 정부에 여러 번 간곡한 편지를 보내서 불교탄압을 중지해 달라고 촉구하였지만 탄압이 계속되자 이에, 틱꽝득 스님은 1963년 6월 11일 판딘퐁(Phan Dinh Phung) 거리에서 가부좌를 한 채로 몸에 기름을 붓고 많은 사람.. 2024. 7. 16.
베트남 다낭의 미케 비치와 천상의 맛 두리안 2024 아시아 영화제가 다낭에서 열리고 있는데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배하에 있었기에프랑스의 영향이 모든 분야에 미칠 수밖에없었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봤던 1992년에 프랑스 감독과베트남이 배경이 된 영화 " 연인" 을 감명 깊게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은 악명이 제일 높은 악의 과일인 "두리안"에대해 이야기를 나눠볼 까 합니다.미케비치 해변의 아침과 함께 오늘을 활짝 열어보겠습니다. 마이안 비치부터 걸어서 미케비치에 오는산책로는 싱그러움이 함께 합니다. 단체 중국인들이 기념사진을 찍는군요.입가의 미소가 너무 보기 좋습니다.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이라 바닷가를 거니는 이들이많지 않은 것 같네요.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 여유로움은여행의 소소한 즐거움입니다. 현지인들은 이른 새벽에 수영을 즐기는.. 2024. 7. 4.
베트남 다낭의 참 조각 박물관을 가다 베트남 다낭에 있는 참 조각 박물관은 정말다양한 역사를 지닌 박물관입니다.프랑스 식민지였던 시절 국립극동 연구원의문화재국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한 박물관이었습니다. 1902년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 추진되고 1915년 프랑스 건축가에 의해 건축이 되었으며1919년에 드디어 프랑스인에 의해 박물관이 지어졌습니다. 프랑스는 각 나라를 침략해서 각종 보물과유물 그리고, 진귀한 것들을 모조리 찬탈해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하는 참략가였지만무거운 돌조각은 별 흥미가 없었는지는 몰라도결국, 조각 공원이라는 이름하에 전시가되었습니다. 그럼, 황당한 조각공원이었던 참 조각 박물관으로 가 보도록 할까요. " 다낭시 문화체육부"" 다낭 참 조각 박물관 "간판에 적힌 내용인데 우리글로는 아주 간단한데베트남어로는 상당히 긴 .. 2024. 5. 3.
베트남 여행 중 들른 후에의 카이딘 황릉이야기 4부 시골마을에 있는 카이딘 무덤은 베트남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무덤인데 그 이유는 미리 소개했듯이 아들인 바우다이 베트남 마지막 왕이 프랑스로 망명을 했기 때문입니다. 카이딘 황릉은 1993년 12월 11일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카이딘 황제가 프랑스에 친화적인 이유는 카이딘의 아버지 또한, 프랑스 식민지에 공헌을 했기 때문인데 카이딘의 할아버지인 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후에 궁을 탈출하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 저항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카이딘 할아버지를 폐위시키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우는데 , 바로 카이딘은 그 아버지의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카이딘 또한, 화려한 장식을 치장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마는 덕분에 프랑스 유학 중인 바우다이가 귀국해.. 2024. 2. 4.
베트남 여행 중 들른 후에의 카이딘 황릉 2 부 후에(Hue)에 있는 카이딘 황제릉(KHAI DINH TOMB)은 애초에 본인이 살아 있어서 황제릉의 용도로 건축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건출을 하다가 도중에 사망하는 바람에 졸지에 무덤으로바뀌지 않았나 싶은데 참, 기구하기도 합니다. 카이딘 황제는 후궁을 두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나중에야 그 이유가 밝혀졌는데 동성애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약에 늘 취해 있고 프랑스의 개라는 오명아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데, 아들인 바우다이 황제도보고 배운 게 그런 건지 , 홍콩으로 망명을 하려다가 거절당하자 결국, 프랑스로 가서 시민권을 따서 프랑스여성과 결혼해서 아주 오래오래 잘 살았더군요. 오늘도 베트남 후에의 카이딘 황릉을 돌아보도록하겠습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 유명한 건축물은 석축으로 많이들 짓.. 2024. 2. 1.
베트남 후에 황궁(Hoàng thành Huế)을 가다 1,000 년의 역사를 고이 간직한 HUE의 황궁을 직접 만나보는 계기가 된 오늘, 그 암울하기만 했던 중국의 지배에 이어 프랑스 식민지가 되어야만 했고 이어, 베트남전의 참상으로 150여개가 넘는 궁전들이 모두 파괴되어 버려 불과 10여개의 궁들만 간신히 그 명목을 이어 왔던 곳이 바로 이 후에황궁입니다. 베트남전 때 무자비한 폭격을 퍼부었던 미군들로 인해 간신히 뼈대만 남은 궁전들과 아직도 남아 있는, 수많은 폭탄과 총알 파편들이 그 참혹상을 대변해 주고 있으며 지금도 느리지만 착실하게 복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1804년부터 황궁을 짓기 시작한 이래 20여 년이 넘는 공사를 거쳐 완성된, 후에 황궁을 국내 KAIST에 의해 재현되어 그 모습을 삼성 TV를 통해 궁에서 방영이 되고 있었습니다. 후에.. 2024.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