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Hue)에 있는 카이딘 황제릉(KHAI DINH TOMB)은
애초에 본인이 살아 있어서 황제릉의 용도로 건축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건출을 하다가 도중에 사망하는 바람에 졸지에
무덤으로바뀌지 않았나 싶은데
참, 기구하기도 합니다.
카이딘 황제는 후궁을 두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나중에야 그 이유가 밝혀졌는데 동성애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약에 늘 취해 있고 프랑스의 개라는 오명아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데,
아들인 바우다이 황제도보고 배운 게 그런 건지 ,
홍콩으로 망명을 하려다가 거절당하자
결국, 프랑스로 가서 시민권을 따서 프랑스여성과
결혼해서 아주 오래오래 잘 살았더군요.
오늘도 베트남 후에의 카이딘 황릉을
돌아보도록하겠습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 유명한 건축물은 석축으로
많이들 짓는데 이 릉 자체는 시멘트로 이루어진 게
특징입니다.
그것도 모두 유럽에서 시멘트를 수입해 와서 말입니다.
계단을 올라와서 뒤를 돌아보니,
안개가 자욱한 경치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용의 마을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게 해태 아닌가? 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살펴보았는데
"용용 죽겠지 " 하는 숏다리 용이었습니다.
이 계단도 세어 보았더니 36 계단이었는데
혹시, 삼십육계를 모방한 걸까요?..ㅎㅎ
베트남 건축 양식이 아닌, 서양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카이딘 황제릉을 보면 퇴폐적이라 그런지 몰라도
상당히 화려하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카이딘 황제릉의 안내문입니다.
팔각정으로 만들어진 전각 안에는 역시, 아들인 바우다이 황제가
세운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데 , 공사기간이 10여 년이 걸렸는데
바쁘지 않은 베트남 국민성으로 보면 그렇게 오래 걸릴 만
하지 않았나 싶은데, 우리나라 건축 시스템이라면 1년이면
충분한 공사인 것 같았습니다.
다들 우산을 받쳐 들어 사진 찍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람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사진 찍으려고 하면
다시 나타나는 바람에 은근히 신경이 많이 쓰이더라고요.
아들인 바우다이 황제가 세운 공덕비입니다.
온, 천지사방이 용 천지입니다.
여기서 용보다 흔한 게 없을 정도입니다.
모든 건축물을 시멘트로 지은 이유가 막연하게
시멘트에 대한 동경심의 발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워낙, 프랑스를 좋아하다 보니, 건축자재도 프랑스에서
수입하고, 건축 양식도 프랑스에서 보고 베낀 것들로
이루어진 정체성 없는 황제릉이기도 합니다.
36 계단을 오르면 또, 다시 36 계단이 나오는데
이들은 36이라는 손자병법을 전혀 몰랐을까요?
그래서인지 아들인 바우다이 황제가 이리저리
도망을 다닌 건 아닌지....
그런데, 궁금한 게 생기더라고요.
많은 탑들 안에 철근을 넣은 건지 아닌지가
엄청 궁금합니다.
단순하게 모두 시멘트로만 구성이 된 건지가
궁금하네요.
카이딘 황제릉은 전쟁터에서는 벗어나서
크게 훼손은 되지 않았는데 , 민란과 프랑스 전쟁에도,
미군과의 전투에도 이 무덤이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황제릉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는 내일 자세하게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유튜브를 하시는 분들이 여기 후에를 오셔서 공통적으로
베트남 후에 역사를 모르다 보니, " 에이~ 볼 게 없네 " 하는 멘트를
마구 날려 베트남 후에 여행을 "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라는
말로 호도를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후에를 오죽하면 유네스코에서 전체 유적지를 등재를
했을까요.
이는, 유네스코를 욕보이는 단어이니 그런 단어를
제발 유투버들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곧 무식의 산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 이들은 여기 묻힌 황제와 같은 화려하고
퇴폐적인 걸 유난히 좋아하는 분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곳에 묻힌 황제도 자신이 퇴폐적이고 낭비스런 황제가
아니라고 굳게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저, 높은 탑 안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요?
단순히 시멘트로만 굳힌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보니, 정말 웅장하지 않나요?
곳곳에 새겨진 다양한 조각과 문양들은 너무 많아
책자로 발간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너무 많은 조각들이 난무를 하고 있네요.
각 탑마다 조각과 문양을 새겨 넣은 걸 보면
마치. 타투를 보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식당에서 타투한 사람을 보면 타투에 대해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자세하게
대답을 해주지만 베트남은 아직, 유교문화로 인해
타투는 일반 처자들이나 남자들이 잘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동네 이웃집에서 누가 타투를 했더라 하면서
흉을 보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래서, 행여 한국분들이 베트남에 오셔서 타투한 여성들을
만나시는데 이는, 되도록이면 피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일반 처자는 거의 타투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에 타투를 하면, 양아치나 조폭들이
하는 걸로 인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워낙 연예인들이 많이 하니 순화가
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특히, 학교 일진들은 손가락에 문신 새기는 게 유행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개취로 몸에 낙서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여기. 카이딘 황릉은 입장시간이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입니다.
코스를 잘 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짧은 치마는 가급적 피하는 걸 권하는데
매표소에 주의사항이 적혀 있는데 크게
문제는 삼지 않지만,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문무대신은 네 명이고, 그 뒤 부하들은 6명으로
총, 10명으로 숫자를 맞춰 좌우에 배치를 해 놓았습니다.
베트남인들의 " 행운의 숫자는 9 "입니다.
동상 하나하나를 보면 베트남인과 서양인 얼굴 형상을
볼 수 있는데 , 그만큼 프랑스를 선망의 눈초리로 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2차 대전 후, 일본이 핵으로 인해 생긴 부상자들을 모조리 살해하는데
이는, 나라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일본은 베트남을 침략해서 베트남 주민을 약, 40만 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중국의 난징 대학살도 일본이 저질렀습니다.
베트남에서는 뒤이어 프랑스 전쟁과 민란 그리고,
베트남전에 어마무시한 베트남인들이 사망을 했기에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 베트남전 이후, 일본이 발 빠르게 정부 요인들에게
무상으로 도요타 차량을 마구 지급했습니다.
그리고, 간접시설등에 참여를 하면서 기사급 인원들을
대대적으로 파견을 하여 참여를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몸으로 하는 노동인력을 파견하는 데 반해,
일본은 거의 토목기사급을 파견합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기사급 인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지요.
이제는 기술력이 남아도는 나라로 발전을 했으니,
우리도 가슴을 펴고 눈을 크게 떠야 할 때가 아닐까요?
%%%%%%%
연어가 올라오는 강가에서 딥넷이라는 뜰채로
연어를 잡는 모습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RlmjGp2cHI
'베트남 다낭과 호이얀 여행 그리고 후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트남 여행 중 들른 후에의 카이딘 황릉이야기 4부 (0) | 2024.02.04 |
---|---|
베트남 후에의 카이딘 황릉(Lăng Khải Định) 3부 (0) | 2024.02.02 |
베트남 여행 중 후에(HUE)의 카이딘 왕릉을 가다 1부 (2) | 2024.01.31 |
베트남 후에(HUE) 여행을 하면서 환전과 유심카드 (0) | 2024.01.30 |
베트남 여행에 들른 후에(HUE) 황궁의 정원과 호수 (1) | 2024.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