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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y알래스카
한국인 최초로 알래스카의 구석구석을 발로 뛰면서 다양한 경험과 여행을 통한 알래스카 전문가 입니다. "인생을 시작하려면 알래스카를 가라"는 말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알래스카는 무한한 도전과 가능성을 갖고있는 마지막 남은 미 개척지이기도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알래스카" 자연속의 삶이 그립다면 언제라도 알래스카로 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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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30. 21:32 알래스카 자유게시판

어제 자전거를 탔으니 오늘은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 볼까 합니다.

어릴 때부터 세발자전거부터 시작해서, 

어른이 되어서는 짐을 가득 싣는

자전거나 신사용 자전거 혹은, 산악용 자전거를 

누구나 한번쯤은 타보지 않을까 합니다.

집집마다 자전거 한 대쯤은 모두 갖추고, 

자전거로 통학도 하고 동네 마실도 다니고 , 

장도 보러 다녔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돋아 납니다.

이제는 다들 자전거 동호회가 생겨 단체로

하이킹을 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비싼 자전거는 자동차 한대 가격과 맘먹더군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개개인의

선호도가 있으니 , 여유가 된다면 뭘 못하겠습니까.

 

정말 자전거는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니

이번 기회에 자전거 타기를 권해봅니다.

자! 그럼 자전거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가 볼까요!

 




18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자전거는

저렇게 나무로 만든 자전거였습니다.

우리나라는

1944년 기아자동차와 삼천리자전거의 

전신인 경성 정공이 일본에서 귀국한

 故 학산 김철호 회장에 의해 설립되었고

1952년도에 자전거를 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퀴를 나무로 만들다 보니, 충격을 완화시키질 

못해 엄청 애플이 아팠을 것 같지만,

그래도 저 자전거를 끌고 나가면 모두들 신기해하면서 

엄청 부러움을 샀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1817년 바로 이런 자전거가 탄생을 했습니다.

거의 뼈대만 갖춘 자전거였지만 그 당시 

아주 획기적이었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우라 나라의 자전거 하면 삼천리를 빼놓을 수 없죠.

 


넘어지지 않게 뒷바퀴는 두 개가 달려서 

중심을 잡을 수 있게 고려를 한 것 같습니다.

 

삼천리 자전거는 1987년 국내 최초로 년간 생산대수 

100만 대를 돌파했으나. 높은 인건비와 물가로 인해

자연히 중국으로 생산 시설이 이전되었으며, 

지금은 부품을 들여와 조립을 하는 수준으로

전락을 했으니,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1870년대에 들어서는 모두 쇠로 된 

자전거가 양산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기사 지금 중국을 보면 시골에서 대나무로 

자전거를 만들어서 타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대단하더군요.

 


1890년대에 들어서는 갖가지 변형을 주어 

자전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번 전문 자전거 샵을 갔더니 , 자전거 한대 가격이 

웬만한 승용차 한 대 값과

비슷하더군요. 아주 놀랐답니다.

 


1900년대에 들어서자 이렇게 바큇살도 제 모양을 갖추고,

 페달도 제 형태를 찾기에 이릅니다.

 

 

바퀴는 문자와 함께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게 되는데,

바퀴는 마차, 자전거, 기차, 기계 등을

 만드는 데 가장 기초가 되며,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온 인류는 항상 빠르게 

그리고, 좀 더 멀리 이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퀴는 이런 꿈을 실현해 주는 중요한 도구가 됐는데, 

바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4500년 수메르 지역에서였습니다.

 

 


산업 혁명기에 수많은 혁신적인 발명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에 자극을 받은 마차 제조업자,

대장장이, 발명가들은 새로운 교통수단을 

만들어내고자 고심했는데,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말의 힘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가는 

마차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들어낸 것은 대부분 

크고 무거운 것이었답니다.

 

 


이런 기계들은 빨리 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별로 실용성이 없어서,

발명가들은 딜레마에 빠졌는데, 마차 같은 

커다란 기구에 증기기관을 달아서

힘을 크게 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구의 크기와 무게를 줄여서 마치 말처럼 

개인용 탈것을 만들려고 시도했답니다.

 


마침내 가장 간단한 방식에서 해결책이 제시됐는데,

마치 아이들이 말처럼 타고 놀던 장난감 목마 같이 

아주 간단한 구조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1791년 프랑스의 귀족

콩트 메데 드 시브락 Conte Mede de Sivrac이

두 개의 바퀴가 달린 목마를 타고 파리의 팔레 

루아얄 Palais-Royal 정원에 나타났습니다.

 이 목마는 나무 바퀴를 목재로 연결하고

 그 위에 올라타서 발로 땅을 번갈아 밀고

앞으로 나가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등장은 극적이었는데, 이 새로운 탈것은 

대단한 소동을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신기한 기계를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이 새로운 탈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것이 역사상 가장 먼저 등장한 

자전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브락의 기계에는 셀레 리페르 

Celerifere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것은 ‘빨리 달리는 기계’라는 뜻이었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슈발 드 보아

Cheval de Bois (목마)’라고도 불렸습니다.

셀레 리페르는 말, 사자, 인어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외형이 아주 아름다웠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앞바퀴로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브락이 셀레리페르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다가

 나무나 집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셀레 리페르는 사실 실용적인 탈것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귀족이나 젊은이들의 오락기구에 더

가까웠습니다.

 

 


셀레리페르는 시브락이 타고 나타나기 이전부터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데,

오늘날에도 아이들은 이런 장난감 목마를 타고 놉니다.

시브락은 어린이들의 장난감 목마를 개조 해서

타기 시작했고

이것이 어른 귀족들의 오락기구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목마는 파리의 멋쟁이 남성들 사이에서

오락기구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팔레 루아얄 정원에는 젊은이들이 당시 유행하는

복장으로 이 벨로시페르를

타느라고 북적거렸다고 합니다.

 이 새로운 놀이는 아주 유명해져서 셀레 리페르를 

타는 사람들이 클럽을 만들고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경기를 하기도 했으며,

그 후 19세기가 되면서 프랑스 젊은이들이 

신나게 탔던 이 새로운 장난감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음 얘기가 없습니다.

자전거 역사는 19세기 초반 독일의 한 귀족의

 이야기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우리나라에서 자전거 대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06년 4월인데

1906년 4월 신문에는 두 차례 자전거 대회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열린 자전거 대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며,

4월 7일 대한매일신보에 자전거 대회가 

열린다는 기사가 실렸답니다.

 

 


1907년 5월 2일 서울 삼선 평에서

내외국인 모두가 참여한 

자전거 운동회가 개최되었으며,

1907년 6월 20일에는 서울에 있던 

한일 자전거 상회 주최로 훈련원에서

동서양의 외국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대회가 열렸고 

1908년 7월 12일에도 한일자전거 대회가 열렸고,

그 후 자전거 대회는 아주 활발하게 개최됐습니다.

 처음에는 자전거 상점들이 자전거를 홍보하기 위해

대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자전거 선수들은 대부분 자전거 

상점의 점원들이었습니다.

그 후 자전거 대회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신문사에서도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1913년 4월 10일 자 매일신보는 인천, 서울, 용산 ,

부산, 평양 등 네 곳에서 경성일보와

매일신보가 공동 주최한 전조선 자전거 경기대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보도했는데,

4월 13일 서울 용산에서 열린 대회는 

일본에서도 일류 선수들이 참가했으며,

대회 날에는 수십 대의 전차가 특별 운행하고 

대회장에는 10만 명 이상의 관중이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뤘습니다.

이날 한국인 엄복동 와 황수복 선수가 일본 선수 4명과 겨뤄

 엄복동 선수가 1등을 차지하고

황수복 선수가 3위를 했고,

평양 경기에서도 엄복동 선수가 우승했습니다.

이때부터 엄복동 선수는 조선의 자전거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아스라이 기억이 나네요.(구전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자전거의 아버지

 

칼 폰 드라이스 남작 Baron Karl von Drais은

 나중에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된

바덴 대공국의 산림 감독 책임자였는데, 

그는 카를스루에의 명문가 출신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임학과 수학,

물리학을 공부했는데 

그가 맡은 일은 그의 성향과도 잘 맞았으며,

그는 엔지니어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광활한 숲과 거친 땅을 감독하는 것이었는데,

이 중에는 가파른 언덕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 넓은 지역을 터벅거리며 힘들게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이것은 그를 지치게 했으며, 그가 새로운 탈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것도 힘든

산림 시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이 기계의 가장 획기적인 것은 

바로 조정이 가능한 앞바퀴였는데,

이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하면, 길고 복잡한 숲길을

 지나갈 수 있을까 궁리를 하던 중,

그는 이 기계를 더 개선했으며 이것은 1817년 8월 1일 

<카를스루에 차이퉁 Karlsruhe Zeitung>에

처음 소개됐습니다.

이 신문은 우편마차로 네 시간 걸리는 거리를

 드라이스가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만에 간 것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엄복동 선수가 일본인과 

대결에서 연전연승하면서

항일정신과 민족의 자존심을 고취시켰고 

엄복동 선수의 활약에 힘입어 자전거 경기는

가장 인기 있는 종목으로 떠올랐는데,

해마다 봄가을이면 서울의 장충단 공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자전거 대회가 열렸는데

 이 같은 자전거의 인기는 1940년대까지 계속됐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노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48년 우리나라는 건국 후 처음으로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으며, 사이클 종목에서는

황산웅 선수와 권익현 두 선수가 국가 대표로 출전했습니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인 황산웅 선수는 

지난, 1946년 3월 서울에서 런던 올림픽 파견

조선인 사이클 선수 선발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조선화폐 1만 원 정도를 쥔 채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혼자서 서울로 왔다가,

그 후 38선이 막히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표주박

중학생 때였는데, 집에 짐 자전거가 있었습니다.

뒤꼍장에는 짐을 실을 수 있도록 큰 짐 안장이 있고, 

사람이 앉는 안장  뒤에는 쇠파이프를

높게 용접을 해서 짐을 높이 쌓고 , 

달릴 수 있는 정말 대형 자전거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엄청 크게 느껴지더군요.

(일명 쌀집 자전거. 기억하시나요?)

 

페달에 발도 안 닫는데도 불구하고 ,

낑낑거리고 타고 나갔다가 

얼마나 넘어졌는지 모른답니다.

어른이 되면 자동으로 자전거를 모두 탈 수 있는데, 

유독 여성분들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어른이 돼서도 타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더군요.

남자들은 어른이 되면 다 탈 줄 압니다.

뒤에 연인을 태우고, 바람에 스카프를 날리며 

신나게 논둑을 달리는 그 기분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하고

날아갈 듯 즐겁답니다.

안 해 보신 분들은 모두 한번 해 보세요.

그 기분 정말 끝내 준답니다..ㅎㅎㅎ

 

posted by 알래스카 여행작가 ivy알래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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